상점이 이룬 변화,
다시 맞은 한계

자료 서울시 / 편집 노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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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이 이룬 변화, 다시 맞은 한계

배동주 기자 ju@sisajournal-e.com 김성진 기자 star@sisajournal-e.com

“뜨는 동네로 주목받은 망리단길,
샤로수길을 지나 요즘 가장 핫한 곳”

서울역 철길로 갈라진 서쪽, 만리동엔 사람이 찾지 않았다. 2014년 9월 23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미국 뉴욕시에 있는 하이라인 파크를 둘러보다 만리동에서 시작하는 서울역 고가를 바꾸겠단 결심을 굳혔을 당시도 만리동의 변화는 모호했다. 2015년 12월 13일 45년간 자동차 길이었던 서울역 고가는 사람이 걷는 길로 거듭나기 위해 폐쇄됐고, 만리동 봉제공장과 남대문 시장을 이었던 상인들의 발길마저 끊겼다.

서울시 고가도로의 옛 모습 / 자료 서울시

1년6개월이 흘렀다. 서울시는 5월 20일 퇴계로와 만리동을 잇는 국내 첫 공중 보행로를 열었다. 만리동엔 이틀 만에 25만명이 몰렸다. 예정된 변화였지만, 변화는 이보다 더 빨리 시작했다. 홍대나 이태원을 떠난 상점이 만리동을 새로운 상권으로 지목한 덕이다. 기존에는 선술집이나 소규모 음식점 등이 있는 정도라 딱히 상권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던 곳이다. 하지만 만리동과 중림동을 가르는 길목은 이제 경리단길 상권을 딴 ‘만리단길’이란 말까지 붙었다.

변화를 일군 상점은 철 지난 상권의 자본을 등에 업었다. 만리동의 한 카페를 찾은 고은진씨(25)는 "만리동은 연남동이나 연희동 그리고 경리단길 이후 뜨는 동네로 주목받은 망리단길, 샤로수길을 지나 요즘 가장 핫한 곳"이라며 "주말에는 인기 있는 장소의 대기시간이 길어 일부러 월차를 내고 찾았다"고 말했다. 김기철 외식사업 컨설턴트는 “만리동 변화는 소위 뜨는 동네를 일군 상업 자본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김기철 외식사업 컨설턴트 인터뷰 / 촬영·편집 강유진
5월 20일 개장한 서울로7017 / 자료 뉴스1

이에 거리를 채운 상가의 면면이 익숙하다. 뜨는 동네서 출발한 돈이 새로운 동네를 띄운 탓이다. 갈빗살 전문점 도마, 스테이크 전문점 풀그라운드, 카페 꼬모레는 모두 홍대에서 만리동으로 넘어왔다. 가파른 고갯길을 따라 오래된 연립주택과 공업사 사이에 간판 없이 위치한 카페 현상소는 해방촌 비스트로 야채 가게가 시작이다. 서울역을 지나 만리동으로 드는 초입에 위치한 레스토랑 썬더볼드는 1981볼드라는 외식 기업이 이미 2014년 4월 문을 열었다.

만리동 중개 업계에 따르면 건물 내부를 리모델링한 식당과 카페로 거리에 환한 빛이 돌기 시작하면서 만리동 상가 자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만리동 대경부동산 안현규 대표는 “홍대나 북촌, 경리단길 등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낮은 이곳에 상가를 내려고 문의를 한다”면서 “공원 호재 여파가 작용했겠지만, 그전에 이미 3000만원가량이었던 상가 권리금이 지금은 평균 4000만~5000만원 정도로 올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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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동 변화를 이끈 시작점으로는 2015년 문을 연 레스토랑 베리키친이 꼽힌다. 베리키친 사장 오준식씨는 디자인 크리에이티브 그룹 베리준오의 대표다. 그는 서울역 고가를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서울시 발표가 나올 즈음 만리동에 들어와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서울로 7017이라는 이름과 브랜드 이미지(BI) 역시 오준식 대표의 재능기부를 통해 지난해 10월 발표됐다. 오 대표는 현재 서울로 7017과 연계해 손기정·남승룡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오준식 베리준오 대표 인터뷰 / 촬영·편집 강유진

오준식 대표는 “만리동은 도심 한 가운데 자리한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곳보다 낙후된 곳이었다”면서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투기 같은 것 없이 그야말로 온전한 곳이라 나중에 이곳이 프랑스 파리의 마레지구나 미국 뉴욕의 소호같은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람이 모여사는 도시는 끊임없는 시도와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이지만, 기왕의 변화라면 조금 나은 방향이었으면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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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동 가게 전경 / 사진 강유진 노성윤 김태길

그 사이 베리키친은 자본에 지친 다른 상권 자본을 불렀다. 안민수 대표가 운영하는 도마코리아가 대표 사례다. 당초 홍대에서 사업을 시작한 안 대표는 현재 만리동에서 3군데 점포를 운영 중이다. 안 대표는 “2009년 홍대에 처음 들어갈 때 280만원이었던 월세가 1300만원으로 뛰었다”면서 “창고로 쓰던 공간을 얻어서 확장을 하긴 했지만, 올해 들어서만 300만원이 올랐다. 이제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아 만리동을 택했다”고 토로했다.

안민수 도마코리아 대표 인터뷰 / 촬영·편집 강유진

하지만 만리동 역시 뜨는 동네의 흥망을 동일하게 반복하는 모양새다. 권리금이 없다시피 했던 만리동 상가엔 한 연예인의 등장으로 권리금이 생겼다. 베리키친에서 10m 떨어진 한 기사식당은 최근 7000만원에 달하는 권리금을 받고 자리를 뺐다. 주변 상가 권리금이 1500만원에서 2000만원대에 형성됐던 것과 비교하면 4배 가까운 규모다. 서울역일대 도시재생 지원센터 관계자는 “뜨는 동네의 악순환이 이미 시작된 것”이라며 “상업자본의 물결에 빨려들었다”고 말했다.

홍용기 해방촌 비스트로 야채가게 대표를 중심으로 디자이너와 주방장까지 총 5명이 “새로운 공간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문을 연 현상소는 베리키친 이후의 만리동을 이끌고 있다. 만리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김아무개씨(35)는 “만리동은 사실 현상소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면서 “현상소가 생긴 이후로 만리동 상가 변화는 급속도로 빨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음 계약 때 월세가 안 오를 리 없지만, 쫓겨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만리동에서 ‘서울은 미술관’이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재준 리마크프레스 대표는 “자본이 들어오면서 원래 있던 콘텐츠가 사라지는 악폐가 만리동에서도 재연되고 있다”면서 “정부와 서울시는 그동안 상가활성화란 명목으로 막대한 돈을 투입했지만 결국 건물주만 혜택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자료 서울시 / 편집 노성윤